다원주의적 사법을 통한 이행기 정의와 초국가적 인권의 실현 - 르완다의 제노사이드와 가챠챠(Gacaca) 법원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Transitional Justice and Transnational Human Rights through Pluralistic Justice - Focused on the Gacaca Courts in Post-Genocide Rwanda
제노사이드와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사법 모델이 적합한지에 대한 물음은 해당 사안이 문화, 사회, 정치의 복잡한 맥락 속에 깊이 관련되어 있을 때, 더욱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가 된다. 이 논문에서는 1994년 르완다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국제적⋅초국가적, 국내적, 지역적 차원의 대응을 살펴보면서, 초국가적 인권과 이행기 정의라는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사법체계의 바람직한 방향성을 모색해보도록 한다. 이 때 특히 법학, 역사학, 인류학, 심리학 내지 정신분석학 간의 학제 간 연구가 주목된다. 르완다의 제노사이드에 대한 다수의 인류학적 비평들은 1994년의 단일한 사건에 논의가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보다 중층적인 역사⋅정치적 맥락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공통된 목소리를 내고 있다. 1994년 르완다 제노사이드에 이르기까지의 후투와 투치의 민족 갈등의 역사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러한 반목이 식민지시대와 각 민족의 정치엘리트집단들 사이에 벌어진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산물임을 이해할 수 있다. ICTR과 르완다의 국내사법체계는 제노사이드를 불러일으킨 인종적 갈등을 종식시켜 끊임없는 복수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새로운 르완다의 정체성을 형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둘 모두는 분쟁해결절차로서 이론적⋅실천적 한계를 가진다. ICTR과 르완다 국내사법체계의 위와 같은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총체적 차원에서 제노사이드 문제를 바라보고, 새로운 국가정체성의 확립이라는 과제를 실질적으로 수행해내기 위해, 르완다 정부는 르완다 전통사회에서부터 분쟁해결의 기능을 담당해 온 가챠차의 현대적 재구성을 통해 화해를 지향하는 공동체 사법으로의 길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가챠챠 법원의 정당성 및 적법성은 대체적 분쟁해결절차가 가지는 의의, 이행기 정의와 과거청산의 역사성, 진실의 발견을 통한 역사적 트라우마의 치유라는 세 가지 지평을 가진다. 르완다 제노사이드와 같은 대규모 인권침해 이후, 이행기 정의는 인종간⋅민족간 폭력의 악순환을 종결짓고, 새로운 국가정체성을 모색하고, 민주적 법치국가로의 이행을 도모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목적은 “정의와 화해 사이의 조화”로 요약될 수 있겠다. 정의와 화해를 화해불가능하거나 양립할 수 없는 대척점에 서있는 가치가 아닌 동시적인 과제로 바라보기 위해, 이행기 정의는 바로 정의와 화해가 지양되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행기 정의와 초국가적 인권이 다원주의적 사법 모델을 통해 – 예컨대 르완다의 경우, ICTR, 르완다 국내사법체계, 가챠챠 법원의 다원적 사법 구성을 통해 – 실현되도록 구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국제형사사법과 국내형사사법, 그리고 지역사회의 공동체 사법은 관할권에 있어 그 효력 상의 우열이 존재할 수는 있으나, 법형성의 차원에 있어서는 수평적이고 병렬적인 구조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행기 정의를 실현하는 제도들은 다양한 법질서들의 공존을 다루는 법다원주의에 대한 인식을 요청한다.